[기자수첩] 설명이냐 서명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김혜리 기자 / 기사승인 : 2018-07-08 20:20:28
  • -
  • +
  • 인쇄
서명하면 끝?…설명 충분히 해야

(이슈타임)김혜리 기자="여기 적혀 있잖아요, 잘 확인하고 서명하셨어야죠"만큼 할 말 없게 만드는 문장이 없다. 서명 직전까지 `을`을 자처하던 사업자가 서명 이후 수퍼 `갑`이 돼버리는 형태는 비일비재하다. 잘못된 관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문서가 갖는 `명시성` 탓에 서명한 사람은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위 문장과 비슷한 맥락의 `읽어보지 않고 서명한 사람 잘못 아닌가`라는 질문에 `NO`라고 대답한 사례가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2015년 2월 홈플러스는 경품행사 등으로 모은 개인정보 2400만여건을 보험사에 231억7000만원에 판매한 혐의로 기소됐다. 경품행사 응모권에 기재된 고객 정보를 수집해 보험사에 팔아넘겼는데, 문제는 응모권에 적힌 `개인정보수집 동의 문구`가 불과 1mm에 불과한 작은 글씨로 적혀있었다는 점이다.


홈플러스는 응모권에 `개인정보가 보험회사 영업에 활용될 수 있다`는 내용을 적어놨다고 항변했다. 이런 이유로 1·2심은 법률상 고지해야 할 사항이 `모두` 적혀 있다며 홈플러스에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이 사건은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가 원심의 무죄 선고를 파기하고 사건을 유죄 취지로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부에 돌려보내며 마무리됐다. 개인정보 활용 고지사항 글자 크기가 1㎜에 불과했던 점이 `부정한 수단을 통한 개인정보 동의`라고 본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도 홈플러스가 응모자 개인정보가 보험사에 제공되는 사실을 명확히 알리지 않는 등 `기만적 광고`를 했다는 판단 아래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을 매겼다.


충분한 설명 없이 받은 서명에 대한 철퇴는 금융권에도 가해지고 있다.


지난 5월 서울고법 민사28부(재판장 이강원 부장판사)는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한 A씨의 아버지 B씨가 메리츠화재를 상대로 낸 보험금소송에서 "보험금 5억50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B씨는 2015년경 아들 A씨를 피보험자로 메리츠화재가 판매하는 보험 상품에 가입했다. 상품 약관에는 `피보험자가 오토바이를 주기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특별약관을 부가하고 보험인수가 이뤄진다`는 내용이 있었다.


아들 A씨는 당시 오토바이를 이용해 치킨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B씨는 오토바이 상해 부보장 특별약관에 따로 표시하지 않았다. 2016년 3월 A씨가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며 B씨가 보험금을 청구했지만, 메리츠화재는 `고지의무 위반에 따른 계약해지`를 통보하고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반발한 B씨는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보험사(메리츠화재)는 (피보험자의) 주기적인 오토바이 운전 사실은 보험계약 인수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항으로 고지해야 하고 이를 고지하지 않을 경우 보험계약이 해지돼 보험금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과 (이를 고지하지않고) 보험계약을 체결하더라도 A씨가 오토바이를 운전하다 사고를 당했을 경우 결과적으로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는 점 등을 상세히 설명해 보험계약자인 B씨가 이를 충분히 납득·이해하고 보험계약에 가입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고지의무 위반이 있었더라도 당시 보험설계사가 A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오토바이 운전과 관련된 사항`에 관해 명시·설명의무를 다하지 못한 이상 보험사는 고지의무 위반을 이유로 보험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며 "보험계약에 따른 사망보험금 5억5000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말했다.


현대캐피탈도 설명이 충실치 못한 무성의한 관행에만 의존하다 대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지난 2013년 4월 A씨는 보증금 2억1000만원에 B씨의 아파트를 2년간 임차했다. A씨는 현대캐피탈로부터 1억800만원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았으며 현대캐피탈은 대출 시 A씨의 보증금 2억1000만원 중 1억2960만원을 추심할 수 있는 질권을 설정했다. 문제는 B씨가 C씨에게 아파트 소유권을 이전하면서 발생했다.


현대캐피탈은 A씨를 상대로 낸 대여금지급청구 소송에서 승소했으나 변제할 자력이 없던 A씨에게서 어떤 돈도 돌려받을 수 없었다. 이후 A씨가 현대캐피탈로부터 대출받아 초기 임대차 관계를 설정했던 B씨에게 1억2960만원을 갚으라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C씨가 아파트에 대한 소유권을 취득해 B씨와 A씨의 임대차 관계를 승계했기 때문에 C씨는 B씨의 임차보증금 반환채무를 면책적으로 인수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B씨는 현대캐피탈에 대한 채무를 면책할 이유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에 현대캐피탈은 항소하며 B씨가 C씨에 아파트를 매매하면서 현대캐피탈에 매매 사실을 통지하지 않은 책임을 물으며 "B씨는 채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씨와 B씨는 매매 당시 현대캐피탈의 약관 계약서인 `질권 설정 승낙서 및 임차보증금 반환 확약서`를 통해 계약했다. 약관 내용에는 `만약 아파트를 팔 때 현대캐피탈에 매매 사실을 통지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심 재판부 역시 `회사가 설명하지 않았다면 약관이라 해도 효력이 없다`며 B씨의 손을 들어줬다.


즉 현대캐피탈의 `설명 의무 소홀`을 지적하면서 B씨에 대한 채무를 면제해준 것이다.


이기택 대법관은 "`약관 규제에 관한 법률`의 취지를 살펴보면 약관의 내용이 어렵거나 생소하다면 사업자는 고객에게 따로 설명해야 한다"며 "설사 약관에 `소유자 변경 시 현대캐피탈에 통보하도록 한다는 조항`이 적혀 있고, 고객이 해당 약관에 확인 서명을 했더라도 현대캐피탈이 고객에게 설명하지 않은 이상 채무를 강제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렇게 서명만 하면 `장땡`인 서명제일주의가 판치는 가운데 소비자의 손을 들어주는 판례가 등장하고 있다. 금융상품이 날로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소비자는 정보의 비대칭성에 따라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잘못된 관행이 왜 `관행`으로써 여태까지 이어져왔던 걸까. 소비자 입장에서는 지금이라도 잘못된 관행이 바로잡히는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말하겠지만, 금융사 입장에서는 이런 `꼼수 영업`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외쳐왔던 것처럼, `법대로` 하자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저작권자ⓒ 이슈타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